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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집안에서 사용할 수 없는 두 단어를 지정하고 있다.

이 두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 모든 주장을 원점으로 돌리고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집안의 두 아이가 필자에게 의견을 이야기 하는 경우 이 두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다시 설명하도록 요구한다. 고집세고 아직 어린 둘째 딸은 이 두 단어를 사용하기를 더욱 좋아하나, 첫째 딸에게는 다른 문장으로 필자를 설득하도록 교육하고 있다.

이 두 단어는 "그래도..."라는 단어와 "어쨌든..."이라는 단어이다.

"그래도"와 "어쨌든"이라는 단어는 모든 합리적인 선택을 뒤로 넘기는 문제아이며, 이 두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 본인 역시 그 대안이 합리적인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아는 경우이다. 스스로 합리적인 대안이 아님을 알면서도 선택하는 함정은 결국은 본인의 최초의 생각이 옳았다는 결과만을 알려줄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와 "어쨌든"이라는 단어의 어감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선택하고 싶지 않은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분명 있다. 그렇다면 그래야만 하는 상황을 좀 더 확고하고 일관되게 설명해 주기를 필자는 원한다. 필자는 두 단어가 들어가는 경우 그 이야기는 듣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그 배경이 상황적인 논리에서 앞서 있다면 그 선택은 불가피하거나 혹은 현실을 넘어선 도덕적인 문제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이 두 단어가 집안에서 사용할 수 없는 단어라면, 필자가 스스로에게 약속한 사용할 수 없는 단어는 변명이다. 필자의 많은 선택 중 분명 잘못된 선택이 있었으나 그 선택의 주최는 언제나 내게 있다. 하지만 필자가 이런 단순한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장을 탓하고 주변의 간세를 탓하도 가난하게 성장한 배경을 탓하고 부족한 시간을 탓하는 등 필자 역시 실패의 원인을 필자가 아닌 "주변의 상황"에 돌렸으나 시간이 지나고 미래를 설계하면서 변명은 오히려 필자를 초라하게 만들거나 최소한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게 득이 되지 않는다면 변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주변의 상황이 그야말로 상황논리로 다른 사람이 이해해 줄 수 있는 정도라면 내가 변명하지 않더라도 다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왜 변명을 하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냉혹하다. 독자 스스로를 관대하게 만드는 장치인 "변명"을 이제 벗어 던지고 독자와의 한판승 싸움을 걸어보라.

아래 글은 김종래의 [밀레니엄맨-미래를 꿈꾸는 또다른 칭기스칸을 위하여]에서 발췌한 글이다. 이 글의 저자 김종래님이 징키스칸의 이름을 빌려 가상으로 쓴 징기스칸의 편지이다. 적은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아!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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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곤의 작은 공간 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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