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탁환은 흡혈귀이다. 하지만 현세에서 흡혈귀라는 사실을 잊고사는 과거를 잃어버린 흡혈귀이다. 김탁환은, 역시 흡협귀이며 과거에 전우치였던 친구와 러시아로 여행을 떠나고 또 다른 미녀 흡혈귀를 만나 과거의 기억을 되새긴다. 김탁환은 부여현감으로 친구는 전우치로 러시아 미녀 흡혈귀는 비구니승으로 과거에서 다양한 이물과 대화하고 사건을 해결하면서 한 생을 살아가며, 비구니승과의 이루기 힘든 사랑을 부여현감은 선택한다.
이와 같은 줄거리로만 요약된다면 이 작품은 밋밋함으로 끝이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작품을 우리나라의 [요재지이]로 끌어올렸다. 총 6권의 두터운 요재지이는 한 편 한 편의 짧은 이야기거리로 다양한 재미를 제공하며 많은 이물들이 등장한다. 한편 이 작품에서도 여우, 용왕 등 우리에게 친숙한 이물이 등장하는 한편 우리만의 이물들이 재창조되고 발견되는 맛이 있다. 요재지이와는 다른 우리들의 이물은 매력적이다.
2권으로 구성된 대부분의 내용은 부여현감과 전우치, 비구니승 3명이 함께 풀어가는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있다. 그제서야 이 작품의 제목이 [부여현감 귀신체포기]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여현감의 활약 중 [요재지이]에서는 느끼지 못하였던 가슴을 누르는 통증이 느껴진다. 안타까움과 슬픔과 한이 느껴지고 비구니승과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슬픔이 극에 달한다. 무엇이 넘치는 재미로 무장한 이 작품에서 슬픔을 느끼게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책을 손에서 놓을 무렵에는 "정말 재미있었다"라는 마음과 가슴아린 슬픔이 같이 남아 있음을 지작하게 된다.
저자인 김탁환은 우리에게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대작으로 더 익숙하다. 아직은 저자 김탁환의 정체를 어떻게 정리해야할 지 낯설다. 역사소설가? 추리소설가? [불멸의 이순신]과 그간의 비슷한 작품들로만 평가하기에는 아직은 가지고 있는 많은 부분을 보여주지 않은 듯한 작품의 경지가 갈수록 새롭고 높아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 매력이 있다.
흔한 소설책과는 다른 저장하고 싶은 소설책으로도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화가 백범영님이 그려놓은 중간 중간 칼라로 인쇄된 동양화는 이 책을 간직하고 싶고 가지고 싶은 매력덩어리로 승화시킨다. 알듯 모를듯한 우리만의 이물도 잘 나타나 있다.
저자 김탁환이 흡혈귀로 거듭나는 과정과 전우치가 현세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등 부여현감을 둘러싸고 있는 과거와 현세의 연결고리를 찾아보는 작업도 나름대로 흥미롭다. 2권의 책을 다 읽고서 다시 1권의 처음으로 돌아와 책을 읽어내려가면 메뵈우스의 띠가 소설에도 적용됨을 알게 되리라.
1968년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문학과 및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 교관을 거쳐, 현재 한남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열두 마리 고래를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풀이해 각각의 희망봉을 찾아 떠나는 자유인의 여정을 그린 장편소설 <열두 마리 고래의 사랑 이야기>(1995),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불멸을 꿈꾸는 인간군상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원적인 문제를 탐구한 역사소설 <불멸> 4부작(1998) 등의 작품이 있다. 문학비평집으로는 <소설 중독>, <진정성 너머의 세계>가 있다.
<나, 황진이>, <불멸의 이순신>, <방각본 살인사건> 등의 작가 김탁환의 신작 소설. 열 편의 연작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철저한 고증과 역사적 상상력을 무기로 삼는 김탁환식 팩션(faction)이며, 추리와 판타지가 결합된 장르소설로, 그 정신적 지류는 지괴소설에 두고 있다고 한다.
인간 곁에 머무는 귀신과 요물, 異物들의 슬픔과 아픔, 그 고통을 헤아리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나, 황진이>에서 함께 작업한 화가 백범영씨의 독특한 삽화가 매우 인상적이다.
부여 현감 아신은 출중한 무예와 명석한 추리력, 용기를 갖추고 있지만, 자신의 관내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들에 대해선 무기력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부임하자마자 벌어지는 사건의 양상이 다음과 같이 이성적으론 이해 불가능한, 해괴한 것들이기 때문.
사건의 예- 낙화암에서 갑자기 하루에 한 명씩 투신자살자가 생긴다거나, 일주일 넘게 잠을 자지 못하다가 혼절하여 죽는 현민이 늘어난다거나, 반야산 기슭에 세워진 돌부처가 처녀의 발목을 잡아 기절시킨다거나, 2월 보름마다 열 살 남짓한 사내애가 백마강에 빠져죽는데 시신을 찾을 길이 없다거나 등등.
정의감에 불타는 아신은 용감히 사건 해결에 나서지만, 초동수사 단계에서 번번이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에 처한다. 그가 직면한 사건이 인간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귀신이나 영물의 해원(解寃)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
이때마다 해결사로 나타나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아신의 죽마고우 전우치다. 그리하여 아신은 전우치와 함께 인간세상에 속하지 않은 괴물들과 만나 겨루거나 화해하며 조선 팔도, 아니 지하, 지상, 천상, 수중, 지하세계를 정신없이 누비게 된다.
<부여현감 귀신 체포기>의 또 하나의 재미는 흥미로운 괴물 캐릭터. 구미호(九尾狐), 사두조(四頭鳥), 삼두견(三頭犬) 등 다양한 이물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이는 작가가 <산해경>, <신이경>, <수신기>, <구비문학대계> 등을 참조하여 동아시아에 퍼져 있는 괴물들을 검토한 후 새롭게 창조한 캐릭터라고. 이외에 '늑대인간', '흡혈귀' 같은 서양괴물도 간간히 등장, 이야기의 재미를 더한다.